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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 듀억하임은 교육학계에 전혀 다루어지지 않았던 사회지식학자, 교육학자

독일계 프랑스인 에밀 듀억하임

(1858년 4월15일-1917년 11월 15일)

 독일도시 이름 바드 듀억하임 온천도시 바드, 목욕탕도 바드, 물이 많이 있으면 바다, 바드!

2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 듀억하임은 교육학계에서 전혀 다루어지지 않았던 사회지식학자 그리고 교육학자이다. 독어독문학에서도 쉴러는 전혀 다루어지지 않았고 주로, 괴테만 다루어졌다. 듀억하임은 프랑스식으로 ‘’뒤르켐’’으로 알려져 있는데 잘못된 것이다. 소르본대학교에서의 1902년에서 1903년까지의 강의 내용에서 발췌한 내용을 여기에서 다루고자 한다. 듀억하임은 ‘’민족들지식학’’ 즉, 문화인류학도 강의를 하였다. 듀억하임은 오로지 사회지식학자로서 교육학을 논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오직 사회지식학만이 교육학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양육사회지식학은 양육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양육이 어떻게 작용이 되는지에 대한 질문을 답하는 것이다. 사회지식학은 본래 역사학을 포함하고 있었다. 양육지식학은 교육학의 추측을 제한한다. 조직적인 성찰은 교육학의 추측을 제한한다. 교육학은 어떠한 이론으로 지금 양육이 행해져야 하는가를 질문한다. 교육학의 대상은 양육이고 양육을 위한 이론을 다룬다. 사회지식학을 사회과학이라고도 말한다. 양육의 시기는 칸트가 말하는 것처럼 12세까지를 말한다. 제 1 유년기 0세에서 5살까지를 거쳐 학교에 입학하는 제2유년기 6세에서 12세까지를 말한다. 양육사회지식학은 양육에 대해서 사회지식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사회지식학은 우리 사회 그 모든 분야에서 다룰 수 있는 의료사회지식학, 언어소통사회지식학, 법률사회지식학, 정치사회지식학 등으로 구분할 수 있겠다.양육지식학은 양육의 처음과 오늘 날, 양육을 묘사하고 설명하는 지식학이고 교육학은 양육이 어떠하여야 하는가에 대하여 예측하는 이론이다.

반성 또는, 성찰이란, 정신적인 활동으로 경험한 일에 대하여 다시 한번 더 되살려 기억해보는 행위로 회상과 추측 그리고 분석을 통하여 의식적으로 그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는 과정을 말한다. 교육학은 사실적 묘사와 설명이 아니라, 추측이다. 그래서 사회지식학은 교육학을 위해서 도움을 준다. 교육학은 양육의 요소들과 연관이 있는 조직적인 성찰을 통해서만이 양육이 습성과 변화가 없는 기계적이며 자동적인 사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칸트는 그 양육 그리고 가르침은 그저 기계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되고 원칙에 근거해야한다고 말한다고 듀억하임은 말한다.

그 지식학은 가장 큰 조심성을 가지고 관찰되어져야만 한다고 듀억하임은 말한다. 그 지식학은 일정한 시간안에 끝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교육학은 같은 원리로 인내심을 가져야 하는 그러한 권리가 없다. 왜냐하면 그 교육학은 기다릴 수 없는 삶의 필요성에 대답해야하는 것이다. 만일 그 환경적인 변화가 하나의 그 어떤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미루어놓는 것은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 교육학이 지식학이 아니라면, 예술도 아니다. 그 예술은 실제로 습관들로, 연습들로, 주최적인 조직된 재능으로 구성되어있다. 양육의 예술은 교육학이 아니라, 바로 양육가의 능력이다. 실제로 그 교사가 행하는 경험이다. 훌륭한 교사이면서 동시에 교육학적인 추측에는 알맞지 않을 수 있다. 그와는 반대로 교육학자가 그 실제적인 양육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을 수 있다. 페스타로찌는 불완전한 양육의 예술을 가지고 여러번 실패한 것을 증명으로 보여주었다고 듀억하임은 말한다. 교육학은 예술과 지식학의 중간에 존재하고 있다. 교육학은 예술이 아니다 왜냐하면, 조직적으로 실제로 행하는 실재가 아니라, 조직적인 그 실재에 대한 생각들이다. 바로, 이론들의 총집합이다. 그것으로 지식학에 가까이 있다. 지식학적인 이론들은 사실을 찾아 표현하는 유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교육학은 행동의 방향을 유도해야하는 긴급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행동을 스스로 하지 않는다하여도 그 행동을 준비하는 그 행동에 가깝다. 바로, 그기에 교육학의 존재가치가 있다. 이러한 2가지의 자연스러움에 의거하여 듀억하임의 주장을 펼쳐보면, 교육학은 단지 하나의 실제적인 이론이다. 또한, 그 이론은 교육학에 기대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제공이 되는 것이다. 교육학은 그 실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 실재를 소개할 수 없다. 그러나 교육학은 전문적인 경험을 유용하게 사용하기 위해서 성찰하는 것을 필요로하고 있다. 교육학은 예술이 아니다, 왜냐하면 준비된 실재의 조직이 아니라, 그 생각들의 조직이기 때문이다. 교육학은 이론들의 총체이다. 그것으로 교육학은 지식학에 가깝게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교육학이 그 권한의 한계를 벗어나서 경험의 위치에서 서 있게 된다면, 먼저 만들어진 계획안에 놓게 되기를 원한다면, 그 양육가는 단지, 기계적으로 적용한다면 규칙성이 없이 마음데로 적용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누구 나 경험하게되는 교육학적인 그 경험을 교육학적인 심사숙고를 한다면 맹목적인 반복에 머무르거나 잘못된 정보 그리고 방법이 적용되지 않은 반성에만 머무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교육학은 근본적으로 가장 방법적인 그리고 수업실재의 제공을 하게 되는 것에 대해서 가장 잘 기록된 성찰이기 때문이다.

도덕양육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지금 아주 시급한 사회적 문제이기 때문이며, 종교적인 도덕성이 아니라, 순수하게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양육은 오직 우리의 생각과 느낌, 실재에만 근거하는 양육이기 때문에 아주 새로운 것이다라고 듀억하임은 말한다. 종교적인 도덕성에 대체해서 바로, 우리 사회를 신의 존재에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실재하는 사회가 바로, 우리의 신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에 간다면 바로, 그기에 사회생활이 있기 때문이라고 듀억하임은 말한다.

듀억하임의 도덕적 목표로서의 초개인적 목표에 대해서 알아보면, 우리의 개인적 이익은 아니지만,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는 모든 행위를 도덕적이라고 간주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고 듀억하임은 말한다. 나에게 도덕적 가치가 없는 것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도 도덕적 가치가 있겠는가 하고 질문한다. 그리고 만약 개인적 이익이 나의 이익이든 다른 사람의 이익이든 비도덕적이라면 여러 개인의 이익이 합쳐져도 마찬가지로 비도덕적이라고 듀억하임은 말한다. 왜냐하면 정수의 0은 항상 0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듀억하임은 말한다. 따라서 도덕적 목표는 개인과는 다른 것과 관련해야 한다고 즉, 초개인적인 사회를 목표로 해야한다고 듀억하임은 말한다. 도덕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단체적 이익을 목표로 하는 행동을 의미한다. 의식있는 존재 즉, 자신의 의식을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을 넘어서는 것은 마찬가지로 의식있는 존재로서의 사회뿐이다 라고 듀억하임은 말한다. 사회는 언제나 널리 퍼져있는 가정처럼 단순한 개인들의 집합체가 아니다. 사회는 고유한 개성을 지닌 독자적 존재 즉, 사회적 존재이다. 인간은 더 높은 존재를 섬길 때에만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그 더 높은 존재는 신적 존재이거나 사회적 존재일 수 밖에 없다라고 듀억하임은 말한다.

유태인은 자연에서 볼 수 있는 존재로 이 세상에서 가장 밝은 별, 해 신을 유일신으로 알아차리고 있었고, 지금은 가장 막강한 힘을 가진 사회를 다시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 사회는 사람들의 단순한 집합체가 아니라, 사회라는 그 존재는 사람들 개개인이 마음데로 할 수 없는 그 절대자와도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고 듀억하임은 말한다. 그래서 그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존재를 우리들 모두에게서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그 양육의 목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