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소르본대학교 사회지식학 겸 교육학 교수로 재직했던 에밀 듀억하임(1858-1917)
7. 17. 2025
프랑스 소르본대학교 사회지식학 겸 교육학 교수로 재직했던 에밀 듀억하임(1858-1917)의 저서 ‘‘국민학교에서의 도덕양육‘‘은 우리에게 하나의 새로운 도덕양육으로 찾아온다. 그 유일한 도덕적인 행위의 목표는 바로, 그 사회이기 때문에 교사들 그리고 대학교의 교육학에서 교육학가들에게도 사회지식학을 가르쳐야 한다고 듀억하임은 강조한다.
인간은 선하게 태어났다 또는, 악하게 태어났다라는 성선설, 성악설 그러한 낡은 이론은 이제 더 이상 필요없다. 문제는 도덕양육은 반드시 초등학교에서 계몽이 된, 자의식이 있는 교사가 국민학교에서 도덕양육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이고 생동감있는 실재로 안내하는 것으로서의 도덕성 양육이다.
듀억하임은 교육학 겸 사회지식학과 교수로서 강의하였던 소르본 대학교에서의 1902-1903년 강의록을, 돌아가신 후에 1918년 세계대전이 끝나고 1925년 책으로 출판되었다. 미국에서는 1961년에 영어로 번역되었다. 1973년에는 도이치 즉, 독일어로 번역되었다.
도덕성은 종교와 점점 더 많이 분리되어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허럼하고 빛바랜 도덕성은 위험하므로, 하나의 종교와는 분리된 새로운 도덕성 양육을 제 2 유년기 시절인 작은 사회의 학급 즉, 국민학교에서 실천할 것을 듀억하임은 강조한다. 왜냐하면 그 시기적으로 가장 알맞는 도덕성개발을 위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듀억하임은 그 새로운 도덕성의 요소들과 함께 더 풍부해진 도덕성을 안내한다. 규정을 지키는 논리적인 도덕성, 사회적인 단체와 관계를 맺는 단체적, 사회적인 이상을 논한다. 종교적이지 않는 도덕성의 특징으로서의 그 자율성은 그 첫번째 요소로서 규정을 지키는 것, 즉 규칙적으로 생활하는 것을 좋아하기 그리고 그 두번째 요소로서 규정을 지키기 즉, 원하는 것을 적당히 자제하거나 자신을 지배하기이며 아래에서 더 읽어볼 수 있다.
그 행동규정의 조직으로서의 도덕성.
그 도덕성 그리고 규칙성에 대한 생각.
그 도덕 그리고 권위성의 생각.
그 규정을 지키는 것의 사회적 유용성.
이상적인 보호둑으로서의 도덕규정의 권위성.
그 도덕조직의 무너짐의 증상으로서의 한계점이 없는 중독성.
그 양육의 작용으로서 그 규정을 지키는 것은 그 양육본래의 성질이다. 그래서 규정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 개인성은 없다. 그리고 민주사상적인 사회에서의 도덕양육의 필요성은 크다.
개인적인 목표들보다 위에 있는 사회에서의 도덕적인 목표들.
사회적인 존재로서의 그 사회 그리고 더 높은 존재로 그 유일한 도덕적인 행위의 목표는 그 사회.
듀억하임의 강의주제는 위기에 처해있는 오늘 날 특히, 시급한 도덕성 양육의 문제이다.
사람들의 관심은 그 사회와 관계를 맺고 참여하는 것으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 사회에 참여함으로써 가지는 사회의 결과물로써의 인간.
생각, 느낌, 습관 그리고 유행의 조직으로서의 그 개인.
가정, 아버지나라 그리고 인류의 그 3가지 효과.
아이가 태어난 나라와 연결해주는 도덕적인 장소로서의 학교.
규정을 지키는것 그리고 단체적인 이상의 통합성.
그 도덕을 창시한 것은 그 사회이다.
그 도덕적인 권위성의 원천으로서 그 사회.
상징적으로 신화적으로 설명하는 그 도덕적인 권위성.
그 사회적 관점으로서의 단체들에 참여하고 그 규정을 지키는 것.
가장 높은 목표로서의 개인적이지 않은 이상.
일상적인 상태에서의 의무와 좋은 것 사이의 구분.
구체적이고 생동감있는 실재로 안내하는 것으로서의 도덕성 양육.
서로 바꾸어가며 강조되는 요소들로서의 규정을 지키는 것 그리고 단체적 이상.
1800년부터 하나의 ‘‘변화하는 시대‘‘에서의 유럽사회들.
하나의 새로운 이상을 소개하는 것은 그 도덕성양육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
듀억하임의 논리적인 도덕계획안.
하나의 논리적인 도덕을 통한 도덕적인 실재의 더 좋은 설명.
그 도덕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 그리고 그 도덕성의 변화성.
그 단체적인 작품으로서의 그 도덕성.
그 자율성에 따르는 그 도덕의식의 요구.
처음에는 비자율성으로서의 시작과 마침내 자율성에 연결하는 도덕성.
독립적인 도덕지식학.
존재하고 있는 도덕성을 지식학적으로 관찰하는 듀억하임의 이론.
계속해서 존재하는 그 도덕 규정의 ‘‘명령적인 성향‘‘.
그 개발의 과제로서의 자율성.
‘‘위험한 착각‘‘으로서의 그 도덕성에 대한 개인성의 전능함.
종교적이지 않는 도덕성의 특징으로서의 그 자율성.
그 첫번째 요소로서 규정을 지키는 것, 즉 규칙적으로 생활하는 것을 좋아하기.
그 두번째 요소로서 규정을 지키기 즉, 원하는 것을 적당히 자제하거나 자신을 지배하기.
여기서 아래의 에밀 듀억하임의 저서 ‘‘국민학교에서의 도덕성 양육‘‘에서 발췌한 글을 국민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전시실에서 전시를 할 것을 제안한다!
- 인간은 신처럼 존중받을 권리가 있는 신성한 존재인 이유는 생동감있는 사회가 있기 때문이다.
- 그 어떤 상황에서도, 도덕적 권위의 이름으로라도 특정한 사고방식을 강요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이성은 스스로 사실이라고 인정한 것만 사실이라고 인정해야한다는 것은 도덕성의 규정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의 행동을 유도하는 ‘‘우리의 생각이 자유롭다면 우리의 행동도 자유로워야한다.‘‘
- 완전한 도덕지식학이 존재한다면 타율성은 종식될 것이고 우리는 도덕세계의 주인이 될 것이다. 도덕지식학은 우리의 해방을 위한 수단이다. 도덕성은 지식학적으로 탐구해야 한다. 기존 도덕성이 사회의 본성에 속하는 것인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지배적인 도덕성이 도덕적이지 못하다는 것이 밝혀진다. 도덕성은 ‘‘사회적 기능‘‘으로서 구분할 수 있다. 도덕지식학은 도덕적 존재로서 사회가 어느 정도의 도덕성을 필요로 하는지 질문해야 한다. 도덕지식학을 통해서 도덕적이지 못함을 인지하고 폭로하는 그 자신은 그 비도덕성에서 분리되어질 수 있고 구분되어야 한다. 인간은 인간의 도덕성에 이의를 제기할 것이 없기 때문에 더 이상 타인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인간이 받아들일 수 없는 도덕성은 인간에게 강요되어질 수 없다는 도덕의식의 요구가 충족된다. 따라서 의지의 자율성이 지배하게 된다. 인간은 스스로 받아들이는 도덕성에만 구속성을 가진다. 이렇게 하여 인간은 도덕의 타율성에서 벗어나 도덕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의 해방은 도덕지식학이 ‘‘완벽하게‘‘ 더욱 더 발전하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우리가 계몽이 되어있어 동의를 한다는 그 사실‘‘은 도덕규정을 지키라는 그 명령을 수동적으로 반드시 지켜야하지만, 동시에 ‘‘자발적으로 지키겠다‘‘는 그 의지에 의해서 그 규정을 지키는 것은 ‘‘능동적‘‘이다. 올바른 도덕성에 자율적으로 따르고자하는 그 의지의 자율성은 우리가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자율성‘‘이며, 우리에게 그 가치를 지닌 유일한 ‘‘자율성‘‘이다. 그것으로 자율성은 올바른 도덕성에 따르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 것이다. 그 오해된 자율성은 그 어떤 가치도 없으며 그러한 경우는 인간은 도덕적이지 못한 경우가 되기 때문이다.
- 우리 각자는 특정 수의 외부의 힘이 모이는 지점이며, 이 교차점에서 우리의 성향이 발달하는 것이다. 만일 그 힘이 그기서 모이는 것을 멈춘다면, 의식도 성향도 발달할 수 없다. 도덕성을 가르치는 것은 설교를 통해서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설명을 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에게 이러한 설명을 거부하는 것 즉, 규정을 지켜야하는 이유를 아이에게 이해시키려하지 않는 것은 아이를 불완전하고 낮은 도덕성에 빠뜨리는 것이다. 도덕적 현실은 결국, 논리적인 이성에만 의존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신은 세상밖에 존재하며 즉, 지식학의 밖에 존재한다. 따라서 도덕성이 신으로부터 나온다면 바로, 그 이유때문에 그 도덕성은 이미 우리의 지성적 능력에 포함되지 않는 영역이기 때문에 종교적 도덕성에는 개인의 자율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외부에서 아이에게 특정행동을 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렇게 되면, 내면의 동기는 무시되고 아이의 의식은 닫힌채로 남게 된다. 이러한 외부적인 강제는 양육이 아닌, 훈련으로만 남게 된다.
- 아이의 불안정성을 개선하고 제한하는데 도움을 주는 습관의 영향력은 크다. 아이는 자신의 존재에 필요로하는 상황과 관련된 모든 것에 습관이 되도록 하는 지점까지 이끌어져야 한다. 아이는 그 습관을 좋아함으로써 내적으로 삶의 원동력 중 하나를 인식하게 되기 때문에 그 아이의 기쁨은 우리가 아이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아이는 교사의 본보기를 통해서 규정을 지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배운다. 규정을 지키는 것은 교사가 그기에 권위성을 부여할 때에만 아이로부터 그 권위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규정을 지키는 것에 대한 권위성을 주기 위해서는 교사 스스로 내적인 그 권위성을 가지고 있어야한다. 교사는 안정된 정신력과 어느 정도의 의지력을 가져야 한다. 교사는 자신이 전달하고자하는 권위성을 자신이 내면적으로 느껴야한다. 교사의 권위성은 자비로움으로 절제되어야하며 엄격함이 무례함과 냉혹함으로 변질되어서는 안된다. 이 권위성은 오직 교사가 그 임무의 위대함을 믿을 때에만 생기는 것이다. 그 권위성은 바로, 교사의 의식에서 아이의 의식으로 전달되어 아이의 의식속에 깊이 뿌리내리게 된다. 규정을 지키는 것은 교사의 개인적인 임무가 아니라, 그 보다 더 뛰어난 도덕성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규정을 지키는 것은 아이들에게 뿐만 아니라, 교사에게도 의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람이 아닌, 법을 지키는 것에 대한 경외심을 심어주는 것이다.
- 교사는 학급에서 나쁜경향이 확산되지 않도록 자신의 권위성을 살려서 좋은 분위기를 강화해야하며 공동체의식이 생기도록 기회를 만들고 학급의 모든 아이들을 공통된 감정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살펴야한다. 그 예로는 역사적사건이나 특정인물에 대한 단체적인 학급토론도 좋겠다. 그러나 학급을 교사가 의장역할을 하며 아이들의 행동을 판단해야하는 일종의 법정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교사는 자신이 내리는 결정에 대해서 학급을 참여시켜야한다. 학급의 여론이 동의하지 않는 판단은 권위성도 없고 영향력도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도덕적행위는 정해진 보상이 없이 행해질때에만 온전한 가치를 지닌다. 도덕성의 진정한 보상은 그 행위가 가져오는 내면의 만족감에서 찾을 수 있다. 교사는 재능있는 또래 아이보다 성적점수가 낮다고 하여도 열심히 노력하는 학생에게는 애정과 우정을 보여줄 수 있다.
- 아이들의 도덕양육에 있어서 자연지식학은 필수적으로 중요하다. 아이에게 사회가 사랑받고 존경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단순주의의 멍에를 벗어던져야 한다. 또한, 아이에게 오늘의 결과 역시 완전한 것은 아니며, 어쩌면 내일 새로운 것이 발견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려주어야한다. 사실을 바로 찾을 수 없다는 점, 실험과 관찰이 필요하다는 점, 사물을 알고 이해하려면 직접경험해야한다는 점을 가르쳐야한다. 그러면 아이는 단순성과 사물의 복잡성 사이의 거리를 이해하게 된다. 사회는 자연의 일부이므로 자연에 대한 지식학은 우리가 인간영역을 바로, 이해하도록 준비시켜줄 수 있다. 자연지식학 양육은 도덕성양육에 있어서 예술 문학의 영역보다 훨신 더 중요하다. 미술과 문학은 이상주의적이며 모든 예술작품은 ‘‘이상에 대한 표현‘‘이다. 그 이상은 근본적으로 현실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며 현실을 초월하고 따라서 우리 자신을 초월하는 것이다. 이상은 우리와 비교했을 때, 마치 우월성을 부여받은 것처럼 보인다. 예술에 대한 애착은 예술적 이상에 집중하고 더 이상 자신에 집중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에게서 벗어나고 자기자신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을 통해 인간은 도덕적 삶의 근원에서 발견되는 것과 유사한 성향을 발달시킨다. 따라서 도덕양육은 예술을 통해서 자체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활용할 수 있다. 예쁘다는 성향은 다른 사람을 돌보게하고 희생정신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덕의 세계는 현실의 세계 즉, 행동의 영역이다. 도덕성은 우리에게 환경을 사랑하고 더 높은 수준의 완벽함으로 이끌어야한다고 요구한다. 모든 행동은 현실속의 대상에서 시작된다.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은 항상 살아있는 존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도덕성은 진지한 삶이다. 이 특정한 놀이 즉, 예술을 하는 것을 배우는 것 만으로는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고귀한 형태의 놀이 즉, 예술을 통해 가장 조잡한 물질적 이익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고 감수성과 의지를 내면화해야한다. 모든 아이들이 특정한 예쁜문화를 접하는 것이 좋다. 예술은 도덕적 품성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형성된 도덕성을 특정 건전하지 못한 영향으로부터 보호하는 수단이다.
- 자연지식학은 유일하게 무엇이 존재하고 있는가를 가르칠 수 있다. 오로지 자연지식학이 우리의 도덕성의 행위를 이끌어갈 수 있는 개념을 가질 수 있다. 우리가 그 어떤 다른 것보다 먼저 알아야하고 배워야할 하나의 현실이 있다. 그것은 도덕적 행위가 요구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은 사회적 현실이다. 자연지식학은 도덕성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학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현실은 자연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세계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사회지식학을 학교에서 가르쳐야하고 사회지식학과 가까운 역사양육은 사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수업은 아이들에게 실재로 존재하며 살아숨쉬는 강력한 존재이며 개인을 지배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 특정 개인이 사회를 만들었고 사회는 개인에게 강요하는 것이 전혀없다는 아주 단순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안된다. 단체적 효과로 모든 100년은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든 이전 100년의 업적을 이어받는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사회가 다음 세대에도 단체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것을 확신시켜준다. 사회는 무엇보다도 단체를 특징짓는 사상과 감정, 특정한 생각과 감정의 방식 그리고 특정한 지적, 도덕성의 특징들의 종합이며 사회는 무엇보다도 단체의식이다. 그 단체의식은 아이의 영혼 속에 심어져야 한다. 학교가 바로, 그 단체의식을 체계적으로 조직하여 아이들에게 전달할 것을 요구한다. 아이들은 자신의 나라의 역사를 다시 체험함으로써 단체의식을 배운다. 그러나 그 단체의식은 계몽된 교사가 역사적 사건에서 추출해낼 때만 사건의 구조에서 나타나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사가 먼저 국가정신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확실한 생각을 가져야 한다.
- 모든 각각의 민족은 인간적 이상을 이해하는 나름데로의 방식이 있으며 우리의 이상은 바로, 인류에게 공동적으로 선에 기여하는 것이다. 양육을 좋게 잘 이루어내기 위한 가능성은 유능한 여론이 개혁에 앞서 준비하고 그 가치를 주장하고 결정 조율하는 것이다. 도덕양육은 여론의 뒷받침이 없이는 작용될 수 없다. 여론이 도덕양육을 도우려면 그 이상을 실천할 의무를 지닌 사람들이 먼저 자신의 이상을 이해하고 사랑해야 한다.
- 끝으로, 동방예의지국 우리나라는 ‘‘세살버릇 여든간다‘‘라는 것을 알고 있는 교육학적인 나라이다.
그래서 재세이화, 홍익인간 그리고 권선징악을 단군조선이래로 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