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는 유럽 사람들에 의해서 중국에서 찾게 되기까지 잊혀진 상태에서 있게 된다. <<노자 Dr. Julius OFNER 1915년>>
오늘 날의 중국의 탄생은 두 명의 남자가 우뚝 서 있다. 공자 그리고 노자이다. 공자는 부처나 예수와 비교해서는 안된다. 공자는 국가 정치가였으며 유대인 모세 그리고 고대 그리스의 법률 정치가 쏘론과 비교할 수 있다. 공자가 정치가로 입문하였을 때, 그 황제 가문은 더 이상 황제의 자리에 머무를 수 없었다. 그 가장 어린 황태자는 포로가 되었고 나중에 살해당한다. 그리고 길고 긴 세월 동안 계속해서 각각의 나라들로 갈라지게 된다. 공자는 보수적인 성향을 그의 민족에게 주입시키고 그 오래된 가부장적인 조직을 국가 운영에 대해서 잘 배운 사람이 이끌어나가도록 하는 것이 평화를 이룩하는 도구라고 내세운다. 공자는 황제 시절의 원형에 가깝지 않았으며 원하지도 않았다. 그의 뛰어난 세상적인 지혜는 그러나 오늘 날(1915년)에도, 2500년이 지난 이 시간에도 그와의 연관성 그리고 그 영향력이 이어지고 있다. 중국에는 오늘 날에도 중국에서는 조상 존경 그리고 부모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들의 어린이들의 주인으로서 행사하고 그 가족은 오늘 날에도 그 전통을 따르고 자신을 다스림, 질서 그리고 하나의 국가의 국민으로서의 느낌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나 동시에 하나의 전통적이고 예식을 행하는 생활 양식과 대가족의 조직을 가지고 있다. 최근(1915년)에는 유럽적인 사상의 영향과 일본의 본보기에 따라서 그 전통에서 멀어지기 시작하고 있다.
공자는 또한, 지혜 지식학자로서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는 하나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2500년 전에 공자는 용기있는 논리적인 방법으로 우리들에게는 칸트와 같이, 그 모든 신화, 그 종교적인 전설의 신화적 견해를 단절시켰다. 그리고 그기에 우리는 신화적인 종교와 어렵게 갈라놓게 하지만, 공자의 가르침을 종교라고 지정하도록 권유할 수는 없다. 동아시아 전역에서 믿음의 대상은 역사 시대의 시초부터 사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었다. 인도에서는 최고신 (브라함 Brahm)에 대한 믿음, 그기에서 그 이후에 그 신 (브라흐마 Brahma) 그리고 그 삼위일체 (트리무티 Trimurti)가 생겨나게 되었으며 그것은 또한, 로마 카톨릭 종교의 길을 찾아가게 된 것이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는 신의 형태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여기에는 그 도가 종교가 주를 이루게 되었다. 그 로마 카톨릭적인 선교사들은 그 단어를 <<신>>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그 신>>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그러면 너무 사람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노자는 그의 가르침을 선전을 하지 않았다. 그의 책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손에 닿도록 하였으며 그래서 그 책은 그의 삶과 마찬가지로 그의 가르침도 소외되어 외롭게 머물러있었다. 나중에 그의 이름을 가리키는 노자라는 이름을 부르게 되는 사람들은 그의 제자들이 아니다. 아마도 인디아에서 중국으로 넘어오게 된 내적으로는 노자보다는 부처에 더욱 더 가까운 사람들인 것 같다. 그들은 그의 가르침에 대해서 나쁜 소문이 나도록 하였는데. 왜냐하면 승려생활을 꾸려나갔으며 직업이 없이 아주 많은 미신들을 지켰기 때문이며 그리고 그들의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노자의 무위를 실천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 반대 성향의 공자 제자들에 의해서 이러한 대단한 정신은 유럽 사람들에 의해서 중국에서 성스러운 서적을 찾도록 노력하는 가운데 그 발견하게 되기 까지 오랫동안 잊혀져 있는 상태에서 머물러 있게 되었다.
노비가 존재하고 있으며 평화로운 방법들을 통해서 자유가 이루어질 수 없는 상태에서 그 노자의 가르침은 실패한 것이다. 공자의 가르침으로 지배자에게도 또한, 그 지배자의 의무를 글로 적어서 규정을 정하고 그 민족에게도 권리가 주어지도록 하는 것 그리고 그 의무를 잊어버린자에게는 화를 낸다는 점에 대해서 노자는 공자보다 뒷전에 물러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