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6일 안중근 열사를 추모합니다!
조국을 사랑한 순국 열사 응칠 안중근을 추모합니다!
안중근 열사에 대한 기록은 다행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공개되지 않은 글들이 있습니다. 독일어로된 안중근 열사에 대한 그 당시의 1912년 로마 카톨릭에서 공식적으로 발행한 책자로 \\ 그림이 있는 로마 카톨릭 선교를 위한 소식지\\ 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전체글이 아닌, 부분 번역을
유럽 오스트리아 동국에 있는 마리 요젠한스 연구원
Marie Josenhans Institut 제공으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로마 카톨릭 독일, 그림 그려진 월간, 세계 선교지 (Die katholischen Missionen Illustrierte Monatsschrift) 40번째 연도 1911년에서 1912년까지
한국 선교 역사에서의 하나의 슬픈 사건
<동아시아의 로이트> 신문 1912년 3월 1일자에서 보도하는 것처럼 한국에서는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하나의 법정공방이 이루어지고 있다. 70명의 수감자들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미국 사이비 기독교의 신자들이며 아마도 또한, 한 명의 미국 선교사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고 한다. 미국 측에서는 그 법정공방의 과정이 일본 정부의 로마 카톨릭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라고 내세웠다. 그러나 그것은 그러한 경우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 일본의 매체는 한국에서의 미국의 선교에 대해서 반복해서 날카로운 비난을 퍼부었다는 점에서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선교에 대해서는 완전히 다르게 평가를 하였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여기의 로마 카톨릭 선교지에서 빌렘이 올해 2월에, 강한 새로운 정부 그리고 그 정부의 은혜에 대해서 기고한 내용이 실린 것에 대해서 일본 신문들 <제펜 타임즈> 그리고 <서울 신문>에서 다시 실었던 것과 동시에 그 기사와 함께 보면, 로마 카톨릭 선교에 대한 평가를 미국 신문들과는 다르게 서술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지금의 혁명이 이루어지게 된 모임 그리고 열심히 따라 다니는 사람들이 널리 로마 카톨릭 선교의 영향력 아래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을 하며 장군 이토의 살인자가 한 카톨릭 신자이었다며 그 이름을 거론하고 있다.
한 카톨릭 신자가 그 정부에 대항하여 그 새로운 운동을 벌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우리는 그 법정공방이 어떻게 결론이 나게 될지에 대해서는 조용히 기다릴 수 있다.
그 이토의 살인을 카톨릭 종교에 부여하고자 하는 그 모든 노력은 그러나 그 실제의 사실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빌렘은 그 살인자를 아주 잘 알고 있었으며 그의 죽음을 준비하였으므로 아주 분명하게 그 사실을 밝혀주었기 때문이다.
선교사의 활동이 지금 환영을 받고 있으며 정치의 열기가 덥친다 할지라도 그 한국인의 영혼의 상태 그리고 카톨릭의 믿음이 그 한국인들을 아주 잘 나타내어주고 있다. 그리고 그 종교의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일본의 열성적인 노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카톨릭 신자가 피를 흘리게 만든 행위는 한국의 선교 역사에서 하나의 슬픈 사건이다. 그러나 그 종교와 그 사건은 상관이 없는, 한 극심한 자극을 받은 애국주의를 통해서 유혹을 받은 한 개인의 행위였을 뿐이었다. 이제 우리는 빌렘의 그 말을 여기에 실었다.
1909년 10월 31일 나는 고백성사를 듣기 위해서 일하고 있었다. 숨을 들이키기 위해서 그리고 멀리서 온 신자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서 고백소에서 나오자 마자 나는 약간의 소란함과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언제나 사람이 그 사실을 숨기는 하나의 나라에서는 드문 일로, 신부님! 하고 한 사람이 나의 얼굴에 대고 이토가 살해된 것을 벌써 아시고 계신가요? 하고 말을 하였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아! 이토, 우리들의 지배자, 그가 얼마 전에 소네에게 그 자리를 내 놓았던 그 사람이 맞아요? 그 사람을 내가 말한 것이었에요. 살해되었다고? 어디에서? 며칠 전에 하얼빈 만주의 북부지방에서요. 그런데 누가 그를 살해를 했지? 누가 그것을 알겠어요? 나는 공소로 다시 돌아왔다.
그 다음 날 우리들은 모든 성인의 날 그리고 그 다음 날은 모든 영혼의 날을 기렸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었다. 단지 약간의 속삭임만 있을 뿐이었다. 11월 2일 그리스도 이름, 안 야콥은 신치엔 도시로 갔다가 저녁 때 돌아오는 길에 그는 나에게 찾아와서 나의 방에서 나를 얼마동안 쳐다보고는 바닥에 넘어지면서 신부님, 그 하얼빈의 그 사람을 알고 있으세요? 하고 소리 질렀다. 아니예요, 나는 그를 알지 못해요. 그러나 나는 당신을 자세히 보게 된다면 나는 알아맞출 수 있다오. 그는 바로 당신의 사촌 토마스로군요.
그래요, 그가 맞아요. 더 이상 의심할 수가 없어요.
그 신문들은 처음에 그의 이름을 약간은 노출을 시키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의 이름의 전부를 적고 있다. 그는 불행한 사람, 이제는 죽은 사람이다.
다가오는 일요일에 성수를 나누어준 다음에, 나는 그 어느 누구의 이름도 말하지 않고 그 십계명 중에서 5번째 계명, 너는 살인해서는 안된다를 소리내어 읽었다. 나는 정의로운 전쟁 그리고 정당방어의 경우에 대해서만 그 사람이 사람을 죽여도 되는 경우들을 나열하였다.
나는 그기에 또, 더하여 애국주의, 외적인 필요성에 의한 개인적인 살인은 그 죄가 사해질 수 없으며 그와 마찬가지로 그 살인 사건에 대한 기쁨은 허락되지 않으며 죄가 된다고 말하였다.
그것을 나는 분명하고도 진지하게 말하였다. 그 외에도 나는 나의 원하지 않는 의지를 나타내 보였다. 신자들 몇 명은 나에게 이러한 나의 태도에 대해서 역겨움을 나타내 보였다. 실제로 한, 한국 사람으로서 그의 조국이 그 해야할 일을 올바른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그 한국 사람은 나의 태도에 대해 고운 눈으로 바라볼 수는 없었다.
바로 그 때, 사라진 그 남자는, 아주 옳지 못하게도, 나는 그것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바로, 그 한국인의 적이었다.
그는 그 한국의 운명을 일본에게 맞기는 그 첫번째의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는 또, 곧 다가올 영토 확장을 위해 준비하였다.
그는 사람이 고요속에서 속삭이는 것 처럼, 그의 러시아의 장관을 하얼빈에서 만나서 그의 조국 일본을 위해서 한국 전체 또는, 더 많은 영토를 하나의 놀랄만한 하나의 선물로 가지고 갔어야 했다. 왠걸, 하얼빈에서 돌아온 것은 그의 시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중국의 신문들은 환호를 하였다. 그리고 그 살인자를 칭찬하는 말로 높이 떠받들었다. 서울의 거리에서는 술취한 사람들이 < 입을 다물어,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를 이토로 만들어버리겠다. > 하면서 서로 마주보며 소리질렀다.
폐위당했던 한국의 황제가 웃음을 터뜨렸다는 소문이 내돌았다. 그 범죄는 들어본 적이 없는 아주 엄청난 용기로 저질러진 일이었다. 그것은 한국인의 분노하는 애국사상과 자존심에게 미소를 보냈다.
그 살인자는 손에서 권총을 쥔체로 스스로 체포되도록 하였다. 그가 그렇게 용기있게 행동을 하였는데, 왜 그가 그 자리에서 자살을 할 (민간신앙적인) 용기를 가지지 못했느냐고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비웃는 말투로 < 나는 내가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이다. 그 나머지는 너희들이 알아서 해야할 일이다. > 하고 대답을 하였다.
나는 나의 머리가 희어질 정도로 며칠 밤을 잠을 청하지 못하였다. 나의 신자가 행한 안타까운 일로 그와 그의 가족에게 그 험한 댓가를 치르게 될 것에 대한 생각뿐만 아니라, 한 선교사의 손이 정치적인 운동에 연루되어있을 수 있다는 말을 하기 때문이었다.
운이 좋게도 한국의 경찰이며 군 경찰인 아카쉬 장군이 나의 방해하지 않는 활동을 증명해주었으며 또한, 그 활동에 대해서 그의 감사 표시를 2번이나 해 주었다. 그 경찰은 그 사건에 대해서 철저한 조사를 하도록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나를 지목하지 않았다.
그 신자, 안 토마스는 나의 마을을 4년 전에 떠났다는 것 그리고 나와 그 외의 마을 사람들을 그 때부터 전혀 연락을 취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며칠이 지난 뒤에 그들은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또, 더 말을 하면, 그들은 내가 그에게 1905년 그의 정치적인 활동을 그만두던지 그의 동네를 신부가 없는 동네로 만들던지 그에게 선택을 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그가 그 마을을 떠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때, 그는 내가 절대로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고 그는 내가 신부로서의 하는 일이 애국적인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미치지 못하고 단지 종교에만 미치고 있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여 그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그의 두 형제를 데리고 그의 마을을 떠나갔다. 그 나머지 가족들, 전체 82명의 훌륭한 신앙심이 깊은 마을 사람들은 여기에 머물러 있었다.
토마스는 그 범죄를 저지르자마자 그가 카톨릭 신자라고 알려지게 하였다. 그가 그의 감옥 감시자로부터 이토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하나의 크다란 십자가를 그었다. 그 불쌍한 이는 독립을 하지 못하면 최소한 원수를 갚는 것으로 그의 조국을 위해서 희생 제물이 되었다고 진실로 믿고 있었다.
하나의 믿음에서 멀어지는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한무리들의 한국 사람들과 함께 일본에 대항하여 3년 동안의 작은 전쟁을 함께 하였다.
이제 그는 내가 그에게 와주어서 그에게 마지막 가는 길을 돌보아 달라고 그 곳으로 옮겨진 형무소 포트 아터 (뤼순)에서 나에게 연락을 하였다.
여행을 하는 동안 내내, 나는 그 일본인들이 아주 친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나라가 양심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그 잠재 의식은 그들에게 흐뭇한 마음을 가지게 하였으며 그들은 나의 행동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의 표시를 나타내었다. 이러한 느낌들을 나는 법관 마나베 선생, 황제의 검찰관 미쪼부시 선생 그리고 일반적으로 내가 만난 그 모든 일본인들로부터 가질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나는 그들을 처음 만났을때 (일본의 대부분의 법학자들 그리고 의사들과 마찬가지로 마나비 선생과 미쯔부시 선생은 아주 휼륭한 독일어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곧바로 나는 유일하게 단지 하나의 교회적인 관청에 의해 그 선고를 받은이에게 그 행사를 하기 위해서 왔으며 나는 정치적인 문제에는 손을 대지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나는 나의 신자의 행위를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상황이 약간은 용서할 수 있지만 합리화는 할 수 없다고 말했으므로 그들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
그 다음 날 3월 8일 나는 토마스 형제들의 안내를 받으며 형무소로 갔다. 그기에서는 나를 높은 천정과 유리가 있는 크고 아름다운 대화의 방에서 기다리게 했다. 나는 내가 차가운 태도를 보여주어야 겠다고 생각했지만 대표자로서의 태도보다는 사람의 도리가 승리를 하였다. 토마스가 그의 2명의 감옥 감시자들과 강당에 들어섰을 때, 그는 나에게 한국적인 큰 절을 하기 위해서 바닥에 엎드렸으므로 나는 그의 손을 붙잡으며 신부로서 아, 불쌍한 토마스, 내가 너를 여기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구나 하고 말하는 것 외에는 그 때, 다르게 행동할 수가 없었다.
그 대화는 오래도록 이루어졌으며 진심어렸다. 뚜렷한 흥미를 나타내보이며 행동한 그 통역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그 오랜 대화를 그 감옥 감시자들도 참을성있게 경청했다. 더 이야기를 하자면, 그 대화가 부드럽게 이어지게 하기 위해서 그들이 차 그리고 담배를 제공하는 그 예절은 그 수감자에게도 혜택이 돌아갔다.
그러나 이러한 첫번째의 대화는 나의 여행에 대한 목적과는 맞지 않거나 아주 작게 맞기 때문에 나는 토마스를 혼자서 대화를 할 수 있도록 그래서 내가 그의 고백성사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그 허락을 해 달라고 분명하게 부탁을 하였다.
(…)
그렇게 우리는 오랫동안 이렇게 저렇게 타투면서 양쪽편에서 침묵을 지켰다. 우리는 마치 우리둘만 하나의 오래된 대성당의 구석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자유로웠다.
나는 그의 손을 잡으며, 나중에 대화를 하자, 오늘은 네가 아주 다른 할 일이 있고 또, 생각할 일이 있어.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야, 하고 말했다.
(…)
최종적으로 하나의 어려운 점은 수감자가 먹게 될 예수의 몸, 성스러운 육체 즉, 성체에 대한 것이었다. 그 형무소의 규정은 당연히 독살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 어떤 음식의 반입도 금지하고 있다. 이러한 의심은 아마도 옳게도 하나의 나라에서 친척 그리고 동무들이 그들의 의무로 생각하고 수감자의 자살을 통해서 그 수치스러움을 감추려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형무소 문이 열렸다. 그러나 그 두 형제는 그 날 입구에서 기다려야 했다.
(…)
나의 방문 전에는 그들이 그에 대해서 미풍양속 그리고 종교가 없는 한 나쁜 살인자로 나타내 보였지만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나중에는 그를 처음과는 다르게, 더구나 친절한 얼굴로 나타내 보였다.
그 일본 사람은 그 개인적인 용기를 이해하면서 적이지만 그를 존중한다.
성 금요일 요한 그리고 은 마지막으로 그들의 형을 방문했다. 그는 그들을 침착하고 친절한 분위기로 맞이 하였다. 그 다음 날 토마스는 사형장으로 나아갔다. 그는 기도할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간청하였고 10분 동안 무릎을 꿇었으며 용기있게 일어서서 스스로 그 처참한 마지막의 목줄이 있는 아래로 걸어갔다. 그리고 나서 큰 소리로 <대한 독립 만세! >를 외쳤으며 거리낌이 없이 그의 머리를 목줄로 밀어넣었다.
부활절의 기쁨 속에서 기다렸던 그러나 비참한 전보가 왔다. <사형은 집행되었다. > 그 작은 종의 기쁜 울림도 그 불행한 이의 죽음을 알려주었다.
울먹이며 그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 모여서 그 불쌍한 남자를 위해서 하늘을 향해서 뜨거운 기도를 올렸다.
이것은 이토의 살인에 대해서 말하는 바로 그 사실이다. 한국의 카톨릭 선교회는 그것과는 전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 토마스의 행동은 그 단지, 한 명의 남자가 개인적으로 행한 것으로서 그 이야기는 하나의 슬픈 사건이다. 그것은 일본의 태도를 통해서 일본이 인정을 하였다. 끝